단순한 그 한마디에 순식간에 주변 십여 장이 전부 침묵에 휩싸였다. 경악에 차, 혹자는 숨을 들이쉬고, 혹자는 숨을 멈추었다. 곧이어, 찰나의 진공이 우뢰같은 호통에 깨졌다.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좋은 것을 대체 어쩌란 말이오?"
분김에 내뿜은 숨에 장로 어르신의 입가 수염이 푸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지귀(志鬼)는 이를 사려물었다.
피막의 날개가 버덕, 거센바람을 쳤다. 우우 둘러싸고 있던 용들이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그 순간, 이미 지귀는 하늘의 작은 점이 되어 있었다. 장로는 한숨을 푹 쉬었다.
"되었다. 어차피 우리 힘으로는 저놈 날개짓을 쫓아갈 수도 없을 텐데."
불안한 눈빛을 주고받던 용들은 다들 수런거리며 자기 처소로 가기 위해 날개를 펼쳤고, 장로조차도 다시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쉬며 날아올랐다.
less..
"빌어먹을 장로!"
지귀의 포효가 동굴 안에 쩌렁 울리자, 수많은 박쥐들이 울부짖으며 날아올라 바위에 부딪치며 앞다투어 굴 밖으로 도망쳤다. 분김에 지귀는 방금 숲에서 낚아온 사슴의 머리를 거칠게 우둑 물어뜯으며 앞발로 꽤 굵직한 석순 하나를 후려쳐 버렸다. 대체 이놈이고 저놈이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야단만 치려 들지 않는가. 장로는 주어진 운명에 따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바로 여왕에 대한 지귀의 마음이야말로 운명이었다. 그렇다. 그것은 운명 외의 다른 어떤 것으로도 규정지을 수 없는 만남이었다. 여왕의 모습을 먼 공중에서 본 순간, 당시 어린 용에 불과했던 지귀의 마음에 불어닥친 폭풍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 언뜻 여왕에 대한 이야기를 입에 담은 순간 떨어진 것은 호된 불호령이었다. 이제 갓 능숙하게 날 수 있게 된 어린 용에게 어른들은 가차없이 헛꿈 꾸지 말라고 호통쳤다. 금빛 알에서 깨어나신 혁거세께서 알영비를 맞이하고 이 나라를 세우신 이래, 왕을 세우는 것은 오직 혁거세의 피를 이은 직계 용의 선택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 혁거세께서 그리 하셨듯 이사금과 마립간께서도 그리 하셨고, 그 피를 이은 마지막 성골인 성왕(聖王)께서 택하신 것이 지금의 임금님이라 했다. 일개 신분 낮은 어린 용이 감히 성조황고의 칭호를 받은 분께 고개를 들이미는 것은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는 소리는 귀에 못이 박도록 들어왔다.
그렇게 어른들에게 주눅들어야 했던 어린 용은, 그러나 이제는 성숙한 화룡이 되어 있었다. 화룡은 가장 용이 많다는 고구려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이 신라에서는 더더욱 귀하기 이를데 없는 존재였다. 어린 용이 백 마리 있다 해도 개중 하나도 나기 어렵다는 것이 불을 뿜는 화룡이었고,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안 순간 지귀의 마음에는 심화(心火)가 타올랐다.
이것은 운명이다. 여왕의 인연은 이제 수가 다 하고 자손조차 없는 성왕이 아니라 바로 젊은 화룡인 지귀 자신인 것이다. 아직 날개가 다 굳지도 않은 상태에서 이미 지귀의 체구는 장로의 그것을 훨씬 능가했고, 앞으로 더 자란다면 서라벌에서 가장 거대한 용이 될 자신도 있었다. 어쩌면 성왕보다는 작을지 몰라도, 젊은 자신의 힘과 능력이라면 여왕의 용이 못 될 리가 없었다.
대체 어째서 이 마음의 불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인가. 왜 다들 신분이니 주제니 하는 말만 입에 담는 것인가. 마지막 성골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노쇠는 확연해서, 용들 사이에는 앞으로 이십년을 못 넘기리라는 말이 은밀히 돌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오래 살아 세간의 존경을 받았다고 해도 지귀의 눈에 그것은 여왕을 잡아가둔 늙은 도마뱀과 다를 것이 없었다.
지귀는 굴 밖으로 나와 단 몇 번의 날개짓으로 남산 꼭대기에 올랐다. 궁궐이 환히 보이는 그 곳에서, 밝은 불빛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
저런 연등에 휩싸여 밝게 웃던, 자신과 마찬가지로 어렸던 여왕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에 가끔 수심이 어렸던 것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한 번이라도 그녀가 먼 공중의 자신을 보아주었더라면, 잠깐이라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면, 그녀는 성조황고라는 칭호를 거부하고 지귀를 점지해 주었을 텐데, 아니 어쩌면 지금이라도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다.
지귀는 궁궐의 불빛을 바라보며 다짐했다. 이 목숨을 내놓게 되더라도, 여왕에게 반드시 자신의 마음을 알리겠노라고. 부처가 점지하신 운명이라면, 틀림없이 그녀도 자신을 알아볼 것이라고, 그렇게 되면 화백회의가 무어라 하건 지귀는 그녀의 용이 될 것이라고 믿으며 다시 날아올랐다.
"------!!!!!"
천천히 전진하던 행렬이 뚝 멎었다. 그와 함께 뒤쪽에서 그 누구도 무시못할 거대한 소음이 들려왔다. 부복해 있던 사람들과 기웃거리던 용들 모두 방금의 거대한 울부짖음에 놀라 여왕의 행렬 바로 옆이라는 것도 잊고 고개를 그 쪽으로 돌렸다. 주위의 군사들이 모두 긴장하는 것을 보며, 여왕은 시종에게 무슨 일인가 하문했다.
"저어...용이라 하옵니다."
"저 소리를 들으니 용임은 알겠다. 대체 무슨 일인고."
"그것이..."
"어서 말하지 않고 무엇하느냐!"
여왕 옆에 섰던 무관 하나가 채근하자 시녀는 그제서야 힘겹게 입을 떼었다.
"소란을 부리고 있는 자는 지귀라 하는 화룡이온데, 저어...전하를 사모하고 있다 하며 뵙게 해 달라 소란을 부리고 있나이다."
순간 좌중에 죽음같은 침묵이 돌았다. 용이 사모한다 함은 무엇인가, 곧 자신의 영원한 동행자로 그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이다. 삶을 함께 하고 그 등에 그 사람을 태우고 일생을 지내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미 이 땅의 가장 성스러운 용에게 왕으로 선택받은 이를 사모한다 함은 어떤 의미인가,
"전하, 이것은 모..."
"고맙구나."
탄식같은 한마디에 반역죄를 논하려던 이의 말이 막혔다. 좌중의 시선이 모두, 단 하나도 남김없이 여왕을 향했다. 무려 부복하고 있던 자들조차 등골로 찬 기운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여왕쪽을 바라보았을 정도였다. 그 시선 중에는 해룡을 거느린 가장 강력한 왕족, 김춘추의 것도 들어 있었다.
"허..허나 이것은!"
"이 몸을 사모한다는데 잠시 함께 하여도 나쁠 것은 없겠지. 행렬 뒤를 따르라 일러라."
잠시 여왕의 조용한 시선이 김춘추의 날카로운 그것과 마주쳤다. 걱정 말라는 듯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은 여왕은 다시 행렬을 진행하라 일렀고, 곧 여왕의 가마 옆에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혹여 용에게 옷자락이라도 밟힐까 당황하여 물러서는 시녀들의 움직임이 부산했다.
"뒤를 따르라 하였거늘."
그림자는 순간 당황한 듯 했으나, 다음 순간 거대한 머리가 내려와 화려한 가마 안에 좌정한 여왕 바로옆에 자리잡았다. 열기를 띤 순박한 시선이 여왕을 꾸밈없이 바라보았고, 여왕은 잠시 그 시선을 마주 바라보았다. 잠시 마주치며 눈을 끔벅이던 화룡은 짐짓 휙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앞으로 나서지는 않았으니 뒤를 따르고 있습지요."
"재미있는 답이구나."
"여왕폐하, 저는 지귀라 하옵고,"
"나를 사모하고 있다 하였느냐."
"예!"
"그렇다면 뒤에서 따라오거라. 길이 좁구나."
다시 고개를 들기 전, 지귀는 여왕의 눈이 웃음을 띠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전율이 지귀의 몸을 감쌌다. 여왕도 지귀가 여왕의 용임을 알아본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전보다 훨씬 성숙한 여인이 된 여왕의 얼굴에는 수심이 어려 있었지만, 이제 자신과 함께 함으로서 그 걱정은 다 사라지게 될 터였다.
"지귀는 여왕폐하를 사모하오!"
마음속의 열정을 견딜수 없어진 지귀는 신나게 꼬리를 휘두르며 다시 한번 외쳤다. 이 서라벌의 모든 용과 사람들이 자신의 선언을 듣고, 자신의 포효를 듣고 알게 될 것이다. 여왕은 지귀의 운명이며, 지귀 또한 여왕의 운명임을 다 알게 될 것이다. 궁궐 구석에서 또아리를 틀고 있을 늙은 성왕이 듣기를 짐짓 바라며, 지귀는 다시 한번 펄쩍 뛰며 외쳤다.
"지귀는 여왕폐하의 용이오!"
마침내 영묘사 계단 앞에 도달하자, 지귀는 신이 나서 문앞으로 나섰다. 가마에서 내린 여왕은 지귀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거라."
"예!"
- 어찌하여 그런 결정을 내렸느냐.
"그럼 제가 달리 어떤 결정을 해야 했을까요."
- 날 버릴 수도 있었잖느냐.
"그런 말씀은 하시는 게 아닙니다."
- 늙은 것의 욕심이었다. 내 차라리 네 아비를 설득했어야 하는 것이었는데...
"아닙니다. 남은 것은 저와 승만공주 뿐이니 궁극으로는 원하시는 대로 될 것입니다."
깊은 어둠 속에서, 마지막 남은 성스러운 용의 깊디 깊은 기침 소리가 우릉 하고 울려나왔다.
- 어린 것이 안됐구나. 아마 너도 힘들었겠지.
"...아닙니다. 힘든 것 없었습니다."
마지막 말에 약간의 떨림이 들어간 것은, 그 안에 일말이나마 거짓이 들어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늙은 용은 굳이 그런 것을 묻지 않았다. 여왕은 손을 내밀어, 늙은 용의 굳고 갈라진 코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영묘사, 그 날의 기도는 길었다. 그 순박한 눈을 본 순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은 부왕이 자신을 성왕에게 의탁하기 전에 이 젊은 화룡을 만났어야 했다. 지귀는 그녀의 용이었고, 그녀는 지귀의 사람이었다. 지귀는 그녀를 위해 날개를 펴고 그녀를 위해 불을 뿜어줄 영혼의 일부였다.
그러나 지귀를 택할 수는 없었다. 이 결정을 내리기 위해 얼마나 갈등해야 했던가. 아무리 운명이라 해도 너무 늦게 만났다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거대한 용의 체구에 기가 질려 훌쩍거리던 어린 자신을 부드럽게 얼러주며, 손이 없는 운명을 한탄하며 안타까워하던 늙은 용을 버릴 수는 없었다. 여왕이라고는 하나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은 성왕의 신뢰 뿐, 이제 귀족들이 어느 용을 장래 이 나라를 받칠 재목으로 보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젊은 화룡이 여왕의 용이 되면, 김춘추를 지켜받드는 해룡 진왕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을 터였다.
대체 몇시간이 흘렀는지 여왕도 알지 못했다. 좌우의 승려들이 다리가 저려 진땀을 흘리고 주위에 서 있던 시녀들의 안색이 변해갈 때가 되어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강은 흐르고, 물은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 허나 불꽃은 모른것을 거스르고 타오르는 법이지.
"그것이 삿된 일임을 깨달아주길 바랬습니다."
- 아이때도 지나치게 어른스럽더니, 어린 용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랐구나.
별이 뜨기 시작한 하늘 아래, 어쩌면 자신의 운명이었을 젊은 화룡이 천진하게 잠들어 있었다. 금팔찌를 두고 온 것은 여기까지, 라는 것. 깨워 데려가지 않음은 이제 앞으로는 이럴 일이 없을 것이라는 것. 지나간 인연을 되돌리지 않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 젊은 화룡이 끊어져가는 혈통에 연연하지 않도록,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싸움에 휘말리지 않기를, 다른 소중한 이를 만나 그를 태우고 자유롭게 날기를 바랬건만.
- 이 일로 너는 신으로 추앙받을게다.
"화귀를 다스린 왕이 되겠지요."
순간 눈에 뭔가 핑 고였지만, 이미 이런 것에 감상적이 되기엔 너무 오랫동안 금관을 쓰고 있었던 한 여인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마음의 불이 넘쳐나 스스로마저 태우고 사라져버린 젊은 용이, 또다른 하늘 아래에서나마 마음껏 날개를 펼치고 날기만을 빌 뿐이었다.
- 지귀는 활리역(活里驛) 사람인데, 여왕을 사모하다 미쳐버렸다. 어느 날 여왕이 행차하는 길을 막다가 사람들에게 붙들린 지귀는 여왕의 행차 뒤를 따르게 되었다. 여왕이 절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동안 지귀가 탑 아래에 지쳐 잠들었는데, 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여왕은 그 광경을 보고 금팔지를 뽑아서 지귀의 가슴에 놓아 두고 갔다. 잠에서 깬 지귀는 금팔찌를 보고서는 가슴이 타들어가 화신이 되니, 그로 인해 영묘사가 전소하였다.
지귀가 불귀신이 되어 온 세상에 떠돌아 다니자 여왕은 백성들에게 주문을 지어 주어 대문에 붙이게 하였다. 그 후 백성들은 화재를 면하게 되었다.
志鬼心中火
燒身變火神
流移滄海外
不見不相親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사람들은 불귀신을 물리치는 주문을 쓰게 되었는데, 이는 불귀신이 된 지귀가 선덕여왕의 뜻만 따르기 때문이다.
-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