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로카르 숲 그늘에서
바라디스는 속으로 욕을 퍼부었다. 운이 나쁘다, 상대는 이런 숲 그늘에서의 전투라면 누구보다도 자신있을 나이트엘프다! 그것도 나이트엘프 남자를 만났대도 운 나쁠 판인데 남자들에 비해 훨씬 사납고 무시무시한 여자! 이미 두번정도 독이 묻은 단검에 스치는 바람에 등에는 긴 자상이 자리잡고 있었고 팔에서도 피가 뚝뚝 듣고 있었다. 필사적으로 주문을 외워보지만 혈관을 침범해 들어오는 독 때문에 제대로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었다.
스스로의 몸을 지킬 요량도 안 되는 사제가 그들의 호위도 없이 이런 위험한 숲에 들어온 것 부터가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카라드는 샤트라스의 무기 장인에게 홀랑 빠져 신나게 모루를 두들기러 간 참이었고, 룬트리는 테로카르 원 종족중 하나인 새 비슷한 녀석들에게 흥미를 느끼고 요즘 계속 그 새새끼 예언자와 대화하느라 정신이 없던 터였다. 지난번 반려동물을 잃은 뒤 더 새끈한 녀석을 길들여 오겠다며 아카샤가 활을 들고 나간 것도, 그걸 구경하겠다며 이반이 따라나간 것도 말하자면 다 자신의 악운이라는 거겠지. 바라디스는 필사적으로 빛의 힘을 불러 자신의 상처를 해독하며 이를 악물었다.
그래도, 여기서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고향에서 천만광년 떨어진 테로카르에서 테로 열매를 손에 들고 한줌 흙이 되는 사제라니, 이건 수치다!
다음 순간,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낀 바라디스는 최대한 빨리 돌아서며 상대에게 타격을 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주문을 끝맺기도 전에 칼자루가 턱에 작렬했던 것이다. 순간 아뜩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두세걸음 비틀거렸고, 간신히 정신을 차리려는 찰나, 승리감에 젖어 섬뜩하게 번득이는 흰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독이 묻은 날카로운 단검이 목에-
"---!"
뭔가 나이트엘프어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뭐지? 나이트엘프의 그림자가 멈칫한다. 그러나 다음 순간, 바라디스는 목에서 무언가 뜨끈한 것이 쏟아지는 것을 느끼며 의식을 잃었다. 아냐, 싫어, 이렇게 죽고 싶진 않아-
- 간신히 살렸어요. 만일 몇초만 늦게 도착했어도 구할 수 없었을 거예요.
공용어다. 오래전, 인간과 하이엘프들의 함께 쓰던 언어다. 물론 하이엘프들은 자기들끼리는 훨씬 화려하고 우아한 탈라시안 어를 썼지만, 그래도 인간과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데에 공감했기에 공용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하이엘프는 없었다. 어쨌건 딱 부러지는 억양을 보아하니 말하는 이는 인간이었다. 인간 여자.
그것을 식별한 순간 조금 더 날카로운 태도로 대화를 나누는, 벨벳같은 목소리들이 귀에 들어왔다. 분명 나이트엘프어 억양이 섞인 공용어였다.
- 아깝네. 머리타래를 베어 끈팔찌라도 만들까 했는데.
- 문라이트 섀도송!
- 네, 네. 우리의 고귀하신 완전소중 사제마마. 화 내지 마세요, 저같은 천민 도적이 사제님께서 막으시는데 어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사와요?
-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리고 습격은 좀 자제하라고. 성지 샤트라스가 바로 옆이야.
- 그리고 더러운 호드의 돌망루 요새도 바로 옆이지 아마?
의식이 더욱 명확하게 돌아오면서, 바라디스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아직 눈은 뜨지 않았지만, 그래서 확실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저 목소리중 '사제'의 것은 분명 그녀였다. 언젠가 가시덤불 그늘에서 한번 마주쳤던, 그래서 동료들을 설득해 간신히 살려보낼 수 있었던 그녀.
- 어쨌건 이제 곧 샤트라스야. 성지로 들어가면 그를 보내줘야 해.
- 아아- 네 그렇죠. 생명의 은인이라니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다음번에 만나면 네가 말리건 말건 반드시 저 예쁘장한 목을 따 버릴 거야, 알겠어?
- 어쨌건 지금은 그를 건드려선 안돼.
상대 나이트엘프 여자 - 아마도 바라디스를 습격했던 그 도적이리라 - 가 몹시 기분나쁘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다행히 그 이상의 리액션 없이 주위는 조용해졌다. 가벼운 발소리가 들리다 곧 펄럭이는 소리가 난 것으로 보아 도적은 밖으로 나간 모양이었다. 곧이어 갑옷 특유의 잘그랑대는 소리도 사라졌다. 그 인간 여자도 나간 것인가? 그렇다면 남은 건-
- 눈을 떠요, 바라디스.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감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 바라디스.
용기를 내어 겨우 눈을 뜨자 그 곳에 그녀가 있었다. 부드러운 은빛 시선으로 바라디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오래 전 그가 보았던 것보다 훨씬 강력한 마법이 아로새겨진 고귀한 옷감으로 된 옷을 입은 그녀는, 여전히 변치 않고 아름다웠다. 그 날, 아직 블러드엘프들과 인간들의 동맹이 깨지기 전, 엘룬의 빛 아래에서 서로 바라보며 마음을 확인했던 밤처럼, 그녀는 여전히 신성한 은빛이었고 밤공기같은 서늘한 보랏빛이었고 상냥한 녹색이었다.
그날 밤처럼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녀에게, 바라디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신이 살아있기를 신성한 태양에게 몇번이고 기도했다고, 그런데 이렇게 당신이 무사히 살아있어서 다행이라고 단 한 마디도 해 볼 수 없었다. 왜냐면, 그녀의 보랏빛 입술이 그의 입술을 덮고 있었으니까. 가벼운 키스를 마치고, 그녀는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 우리는 샤트라스로 갈 거예요. 문라이트를 용서하세요, 그녀는 최근 호드에게 친구를 잃었어요.
- ...우리는 모두 서로에게 서로를 잃고 있죠.
- 맞아요. 이 피의 순환은 끝나야 해요.
바라디스는 녹색 눈을 내리깔았다. 과연 그럴 날이 올 수 있을까? 지금으로선 불가능해 보일 뿐이었다. 아달이 지배하는 샤트라스에는 분명 절대적인 평화가 있었다. 하지만 그 곳을 조금만 벗어나도, 이렇게 서로를 향한 적의와 죽음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이마 위에 입술이 가볍게 내려앉았다.
-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 모르겠어요. 그저 전 그때까지 기도할 뿐이죠. 당신이-
무사하기를.
그 기도엔 호드도 얼라이언스도 없었다. 오로지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는 마음만이 남아서, 아달이 지배하는 성지의 평화, 영원히 계속되는 아달의 노래에 한 가지 가락을 더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