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시 고원 바위그늘에서
썬더블러프 출신의 드루이드 룬트리 레이지토템은 곰 모습을 풀지 않고 묵묵히 상대를 바라보았다. 인간 여자가 단단히 각오한 듯 입술을 물고 그런 레이지토템을 쳐다보고 있었다. 빛의 힘이 둘린 망치와 방패를 든 여자는 아마도 스톰윈드의 성기사인 듯 싶었다. 그런 둘 뒤로는...
"저년을.....죽여....룬트리..."
머리에 혹이 오그리마의 그리핀 탑처럼 쌓인 채 쓰러져 이 쪽을 보며 이를 갈고 있는 카라드와 기절한 아카샤, 그리고 바라디스가 널부러져 있었다. 이반은 어디갔는지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도 그가 늘 그랬듯이 상대를 단숨에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숨어버린 것 같았다.
이렇게만 말하면 룬트리 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성기사 뒤로는 한때 노움 흑마법사였던 무언가가 아카샤가 사랑하는 곰의 앞발에 퍽 퍽 두들겨맞고 있었다.(저래봤자, 어차피 성기사가 빛의 힘으로 어떻게든 수습해 내겠지) 그리고 드워프 전사는 바라디스가 내지른 영혼의 절규에 날뛰며 지평선 어딘가로 정신없이 사라져 버린 터. 남은 것은 이 여기사와, 꼭 이반마냥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는 나이트엘프 한 명 뿐이었다.
여기서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오히려 동귀어진하게 되진 않을까?
룬트리는 어떻게 해야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을까 곰곰히 생각하며 일단 뒤집어 쓰고 있던 곰 형상을 풀었다. 눈앞에 거대한 타우렌 남자가 나타나자 여기사는 꽤나 놀란 것 같았지만, 입술을 물고 태연한 척 하는 걸 보니 그 쪽도 나름 절박한 모양이었다.
'뭐 하려는 거야?'
이반의 귓속말이 바람결에 가볍게 실려왔다. 예민한 룬트리의 귀가 아니라면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 여자여, 나는 우리가 평화롭게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오."
'무슨 말이야? 공용어가 서로 다르잖아. 하나로 못 알아들을 텐데.'
이반의 속삭임을 무시하며, 룬트리는 침착한 눈으로 여기사를 바라보았다. 성기사들은 살생을 함부로 하지 않는 이들이며, 그와 함께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자들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또한 드루이드로서 모든 필요한 기술은 몸에 익힌 바 있다. 살아남는 데 대해서라면 이 기사에 지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이다. 아마 이제 남은 이 둘이 싸우기 시작한다면 한도 끝도 없이 싸움은 늘어지고, 승부가 어떻게 나건 남는 것은 상처뿐인 승리일 것이다. 룬트리는 어떻게든 그것을 전하고 싶었다.
먼저 자신의 몸에 가벼운 회복 마법을 건다. 그리고 여기사에게 그녀의 망치를 가리켰다. 가볍게 손뼉을 쳐서 둘이 싸우면....을 표시한 다음 양손으로 자신의 목과 그녀의 목을 긋는 동작을 한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핵심 메시지를 건넸다. 손가락으로 하늘의 해를 가리킨 다음, 서쪽 지평선까지 손을 내려보낸 것이다.
'.....그러니까 대체 뭐 하는 거냐고 룬트리.'
'치유하는 드루이드와 치유하는 기사만이 알아볼 수 있는 사소한 이야기라네.'
그리고 룬트리는 잠시 심호흡을 한 뒤, 자신의 평화 메시지를 건네기 위한 마지막 화룡점정을 시도했다. 타우렌 전통의 춤을 추기 시작한 것이다!
옆에서 이반이 어이없어 하다 못해 실성한 것처럼 킬킬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호드 망신'이라는 소리도 들려온 듯 했다. 하지만 여기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기사의 녹색 눈이 한동안 룬트리를 응시하더니, 빈틈없는 경계태세로 들고 있던 망치가 슬쩍 밑으로 내려갔다. 옳지, 옳지. 메시지를 알아달라고.
여자가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뭔가 공용어로 말하더니, 망치를 허리에 달린 고리에 걸어 고정시켰다. 그러고는...그녀도 춤을 추기 시작했다! 팔을 앞으로 척척 뻗은 뒤 어깨에 교차로 얹고 양손을 허리에 대고 엉덩이를 살랑, 살랑. 아마도 인간 여자들은 저렇게 춤을 추나 보다. 잠시 뒤, 늘씬한 키에 탄탄한 근육, 새까만 가죽옷을 온 몸에 두른 나이트엘프 여자가 스르륵 허공에서 나타났다.
"이반, 나와서 춤 좀 추게."
"지금 뭐라고오?!"
"자네가 나오지 않으면 이 평화는 완성되지 않아. 저 쪽은 이미 평화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네."
"제길......"
경험많은 이반은 이게 무슨 얘기인지 분명히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따르기는 싫겠지만.
그렇게 룬트리의 춤 덕에 다들 무사할 수 있었지만, 훗날 카라드는 그 광경을 두고두고 욕설을 섞어 이야기하며, 점잖은 룬트리의 꼬리가 살래 살래 흔들리던 광경을 지치지도 않고 엄니 사이로 침을 튀겨가며 묘사해 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룬트리는 말없이 한 마리 곰이 되어 마른 고기를 우적였고, 아카샤와 바라디스는 의식이 없어서 그 광경을 보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리고 이반은..
"그러니까 이반 너도 그때"
"......새 독맛을 보고 싶나보지, 친구."
귀여운 인간 여기사가 떠날 때 손 흔들며 헤실헤실 인사했다는 걸 죽어도 부정하는 것이었다. 카라드가 다 봤는데도.
-끗-
요약하면
"님 회드루랑 신기랑 붙으면 누가 이겨염?"
".........그거 붙느니 그냥 튀겠다."
후다다다다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