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자디스탄 크래쉬
"음?"
그라함은 의아한 눈으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한 무리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가로막았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그라함을 목표로하고 가로막은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둥글게 무리지어 뭔가 외치고 있었다.
"빌리, 무슨 말인지 알 것 같나?"
"불행히도 아자디스탄 어는 몰라."
확실히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그 중 한 단어가 그라함의 귀에 들어왔다. '쿠르디스'.
사람들은 그 단어의 앞뒤에 뭔가를 붙여 외치며, 무언가를 우르르 둘러싸고 있었다. 쿠르디스라고 하면 이전에 아자디스탄과 무력충돌이 있었던 민족이다. 그렇다면, 지금 저 사람들의 원 가운데 있는 것은?
"어이, 그라함!"
흰 소매의 팔이 불쑥 보인 순간, 그라함은 빌리의 제지 따위 듣지도 않고 몰려있는 사람들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쿠르디스의 개새끼가!"
"네 더러운 땅으로 돌아가!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세츠나는 고함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휘둘리고 있었다. 휘둘리고 있다지만 적어도 이 무차별적인 폭력에 의해 크게 다치지 않도록 머리는 양팔로 잘 감싼 상태였다. 사실 예상 가운데 들어 있는 일이긴 했다, 꽤 최악에 가까운 예상이긴 했지만. 아직도 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아자디스탄에 쿠르디스 혈통이 물씬 느껴지는 세츠나가 들어간다는 것은 확실히 모험이었으니까.
솔직히 말해서 자신의 능력을 전력으로 발휘한다면 지금 이 사람들 가운데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도 없다. 그러나 총은 말할 것도 없고, 여기서 주먹이라도 잘못 써서 사람들을 더 흥분시키거나 주목을 끌게 되면 그게 더 위험하다. 지금 멀거니 보고있는 사람들이나 군인들마저 눈에 핏발 세우고 달려들면 그때엔 정말 목숨이 위험해지는 것이다.
'빨리 끝내라...'
꾹 다문 입에 이를 사려물며, 세츠나는 사방팔방에서 붙들고 잡아끌고 가격해오는 손들을 그저 버텨냈다. 몸을 잘 구부리고 머리를 감싸면 적어도 급소는 노출되지 않으니까, 아무렇게나 겨눠오는 멍청한 주먹따위는 몇번이건 버틸 수 있다.
"어이, 당신들! 이봐, 어이!"
일단 급한 김에 뛰어들었지만 사람들은 그라함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했다. 린치를 당하고 있는 대상은,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작은 몸집의 소년으로 보였다. 그라함은 답답한 마음에 경찰이라도 없나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도움을 줄 만한 이는 전혀 없어 보였다. 먼 발치에 서 있는 군인들도, 그저 멀거니 다른 쪽을 보며 잡담을 하고 있다. 일부러 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어린애한테 무슨 짓이야!"
다들 영어를 전혀 모르는 건지 혹은 듣고 무시하는 건지 몰라도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런 식으로 외쳐봤자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으리라는 점이었다. 전장의 군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빠른 판단과 선택. 그라함은 잠시 생각하다 이를 악물었다.
'젠장 그 수밖에 없나!'
세츠나는 문득, 자신에게 정신없이 쏟아져들어오던 주먹질이 일시에 멎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막 들려온 총성 때문임도 깨달았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내리고 대체 무슨 일인가 알아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올린 순간.
"...유니온의...군인?"
나직하게 중얼거린 말을 들어낸 이는 없었다. 다들 손을 공중으로 들어올린 채 서 있는 군인을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역시 너였나.'
그라함 에이커는 자신의 예리한 동체시력과 사리판단에 뿌듯함을 느끼며 이 쪽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는 세츠나에게 웃어 보였다. 자아, 이제부터 널 구해주지 소년.
"당신....뭐요? 저 소년을 알고 있소?"
그 표정을 보았는지, 군중 중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아자디스탄 억양이 심하게 섞인 서투른 질문이었지만 분명 영어였기에, 그라함은 반갑게 얼른 대답했다.
"나는 그라함 에이커, 유니온의 파일럿이오. 그리고 저 소년에 대해서라면, 그렇소. 잘 알고 있소."
"...?!"
'거짓말!'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하나도 득될게 없는 행동이라는 냉정한 판단이 세츠나를 침묵시켰다. 적어도 그는 자신에게 간신히 보인 탈출구를 자기 손으로 단번에 닫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으니까. 헌데, 대체 무슨 말을 할 생각인 걸까. 말 내용에 따라서는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해서라도 저 남자를 쏘아버려야 할 수도 있다. 일전의 만남에서 세츠나는 바로 저 남자에게 연기를 간파당해 버렸고, 그 뒤 이 남자가 어떤 조사를 어디까지 진향시켜 자신의 정체를 추론했는지, 소년으로서는 오직 짐작해 볼 수밖에 없었다.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을 의식했는지, 남자가 짐짓 한번 웃어 보인다. 꼭 헐리우드의 배우 같은 웃음이다.
"말하자면, 난 저 아이의 보호자요."
군중들 중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즉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놀라움과 의심이 섞인 듯한 모습이었지만 그 중 가장 놀라고 있는 것은 사실 세츠나였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라함 에이커라고 스스로를 밝힌 저 유니온 군인와의 교류가 절대 우호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좀더 솔직해지자면, 어쩌면 세츠나는 그 자리에서 이 남자를 쏘아버렸을지도 몰랐을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 남자는 갑자기 끼어들어 자신을 도우려고 하는 것일까?
그 사실에 너무 놀란 나머지, 세츠나는 표정 관리하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말하자면, 지금 세츠나의 표정은 - 물론 세츠나는 기본적으로 표정이 다양한 편이 아니라, 남들이 보기엔 비교적 담담해 보이긴 했지만 - 주변의 사람들만큼이나 놀란 듯한 모습이었던 것이다.
"저 아이는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은데?"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도 놓치지 않았다.
그라함 에이커는 속으로만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이야기가 안 좋게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아자디스탄어로 술렁대었고, 일단 유니온의 군인이라고 하니 다들 거리를 두며 슬슬 흩어질 듯한 느낌도 있었지만 정작 의심을 제기한 사람 주변에서는 또 고개를 끄덕이며 이 쪽을 흘끗거리고 있었다. 소규모이긴 해도 군중이라는 괴물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다. 몰려있는 양떼는 일견 방향성이 없어 보이지만, 고집센 염소를 섞어두면 강한 고집을 보인다.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챈 그라함은 잠시 생각하다가, 충격 요법을 택하기로 했다. 기왕이면 '염소'의 대가리를 한 번에 포맷시켜 줄 만큼 강한 것으로 골라서.
"그렇다면 밝힐 수밖에 없겠군."
세츠나는 마음 속으로 지금이야말로 정말 총을 뽑아야 할 때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자신을 린치하려던 자들이라고 해도 민간인 피해는 싫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아니, 어쩌면 저 자만 쏘고 끝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불행히도 그 전술은 끝내 제대로 된 계획으로 정립되지 못했다. 왜냐면, 남자가 믿을 수 없는 발언을 했기 떄문이었다.
"나는 저 소년의 보호자가 맞소. 아니, 저 소년을 여기 데려온 건 나요. 사실 여러분의 풍습에는 어긋나는 것이라 자세히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우리는 지금 함께 지내고 있지. 흠, 말하자면,"
이 뒷말을 잇는 데에는 그라함이라고 해도 조금 용기가 필요했다. 물론 늘 넘칠만큼 갖고 있긴 했지만.
"그는 내 연인이오."
그라함의 영어를 단번에 알아들은 소년의 적갈색 눈이 경악으로 더욱 크게 벌어졌다. 뭔가 굉장히 강렬하게 항의하고 싶은 듯 입을 열려 했지만, 다행히 그 전에 아까 더듬거리며 영어를 했던 남자의 낯빛이 창백해지며 그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터져나왔다. 아자디스탄어인지라 그라함으로서는 그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그것이 그라함이 원했던 효과를 불러왔다는 것은 명백했다. 그 남자가 소년을 향해 손을 뻗으며 뭔가 외치자 마자 소년을 둘러싼 사람들의 원이 순간 크게 넓어져 버렸던 것이다. 소년에게는 좀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일단 중요한 건 목숨 아닌가. 기왕 인간의 담을 가로질러 열린 길을 통해, 그라함은 여유로운 태도로 소년에게 다가갔다.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는 것을 보니 단단히 화가 난 듯 했지만 어쩔 수 없다는 건 그 쪽도 잘 알고 있을 터.
"어떤가 소년, 몸은 괜찮나?"
"......네놈......"
"그런 반응을 하면 수상하게 생각할 거야. 무엇보다도 지금도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세츠나는 이를 악물었다. 확실히 이제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서 혐오와 경멸의 눈빛을 던지고 있었지만, 개중 몇몇은 이 쪽을 끈질기게 관찰하고 있다. 그라함이 거짓말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아자디스탄을 도우러 온 유니온 군인의 애인이라면야 쉽게 손댈 수 없어도, 그게 아니라면 얼마든지 다시 그라함의 눈앞에서 끌려나가 린치당할 것이다. 물론, 솔직히 말해서 그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지만. 세츠나는 눈앞의 뻔뻔스러운 얼굴에 대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나무랐다.
"이런 억지가 통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통했다고 생각한다. 이미 주먹은 멈췄지 않은가."
"하지만 의심받고 있어."
"동감이다."
그라함은 소년에게 다가와 어디 다친데는 없는지 살펴보며 조용히 답했다. 그리고 속으로만 웃었다. 그 때도 느꼈지만 이 아이는 보통의 아이와는 너무나 다르다. 생각하는 속도가 아주 빠르고, 아마도 위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단숨에 많은 것을 생각하고 결론짓는 습관이 붙은 듯 하다. 내전이 만든 아이인가. 어쨌건 이렇게 침착한 타입이라면, 이제부터 자기가 할 일도 잘 맞춰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어쩔 셈인가."
"자, 잠시 얌전히 협력해 줘."
무엇을 말인가, 라고 묻기도 전, 남자 어른의 강한 팔이 세츠나의 마른 허리를 안고 품 안에 끌어당겼다. 반사적으로 밀쳐내려 했지만 역시 남자 어른의 힘을 물리적으로 당해낼 수는 없었다. 깜짝 놀란 세츠나의 볼에 마치 정답게 입맞추듯 입술을 가져가, 남자는 웃음기 담긴 목소리로 재빨리 속삭였다.
- 눈 감아.
갑작스런 말이었기 때문에 따를 수 없었다. 남자의 초록색 눈과 금발머리가 시야를 가득 메우고, 곧이어 그라함 에이커의 입술이 세츠나의 입술에 강력하게 밀려들어왔다.
"?!"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 틈도 없이 입술이 상대에 의해 강경하게 벌어지고, 예기치 못한 광경을 보게 된 사람들의 경악성을 뒤로 하고 혀가 기어든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려 하자, 오히려 강한 팔로 허리를 더 세게 껴안으며, 게다가 이제는 다른 손으로 검은 머리카락을 얽으며 키스해 온다.
자연스레 숨이 가빠졌다. 몸에 힘을 잔뜩 주고 어떻게든 이 치한같은 시커먼 남자녀석을 떼어내려 하느라 혀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어 코로만 숨을 쉰 까닭이다.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이 등으로 올라오고, 숨이 가빠 공기를 구하며 고개를 젓자 오히려 더 깊이 키스해 온다.
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차라리 아까의 린치가 나았다고, 소년은 반 이상 진심으로 생각했다.
"....!"
혀까지 섞어넣은 긴 키스 끝에 그라함이 입술을 떼자, 얼이 빠진 주변 사람들이 세츠나 쪽을 쳐다보았다. 그라함은 무서운 얼굴을 한 소년에게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혔다.
"그런 얼굴 하고 있으면 곤란하다, 소년. 적어도 그때 같은 연기라도 보여달라고."
"....누가!"
할까보냐, 라는 말은 다시 다가온 입술에 눌려 사라졌다. 망연자실한 표정의 세츠나를 앞에 두고, 그라함은 다시 여유롭게 웃으며 주변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말했다.
"여기 있었나, 쿠르디스 사람이 아자디스탄 거리를 돌아다니는건 위험할 거라고 그렇게 얘기했었는데."
건담 마이스터 세츠나. F. 세이에이는 눈앞의 녀석에 대한 살의를 애써 억누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 생존을 위한 길을 모색했다. 그리고 결정했다. 좋아, 장단을 맞춰 주자. 일단 여기서 무사히 나갈 수 있고 톨레미에 무사귀환할 수 있다면 굳이 못할 짓은 아니니까. 어차피 이런 행동을 금지하는 신 따위 자신은 오랜 옛날에 버렸고, 중요한 건 생환 뿐이다. 지금 이 남자의 행동에서 느낀 욕지기는 어디까지나 관습적으로 동성애, 소년애에 대해 극단적으로 혐오하는 자신의 관습적 기억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은 살아야 하지 않는가. 살아서 엑시아에게 돌아가 톨레미로 귀환해야 한다. 세츠나는 스스로를 신경써서 계속 잘 타일렀다. 그리고, 무사히 빨리 빠져나오기 위한 연기를 할 준비를 마쳤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표정을 풀기 위해 노력하며,
"미안해요. 사실 보고 싶었던 게 있어서..."
정말 미안한 듯 샐쭉 웃는 모습에 사람들 사이에 다시 한번 어떤 단어가 물결치듯 흘러갔다. 세츠나는 '남창'이라는 의미의 그 단어를 알아들었지만 그라함은 아무것도 모른다. 물론, 짐작가지 않는 바는 아니었지만.
어쨌건 보란듯이 팔을 내밀어 남자의 품에 안기고, 적절히 어깨를 감싼 팔에 기대며 입술을 남자의 뺨에 가져간 소년은 거기 살짝 입맞추며 남들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했다.
'네 녀석, 다음번에 마주치면 반드시 쏴 버리겠다.'
"자! 그럼 돌아가자."
그 말을 듣고도 정신 못 차렸는지, 그라함은 한 팔로 소년의 어깨를 푹 감싸쥐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이 쪽을 보고 있는 빌리를 향해 걸어갔다.
그라함의 행동에 대한 농담거리들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빌리는 소년의 얼굴과 몸을 빠른 속도로 살폈다. 함부로 잡아당겨져 옷 솔기가 조금 터져 있고 얼굴 군데군데 긁힌 자국은 보였지만 심각한 폭력의 결과라고 할 만한 것은 사실상 거의 없다. 아까 사람들의 기세로 보아선 어디 한 군데라도 부러뜨릴 것 같았는데, 그러지 못하도록 제대로 피해냈다는 것인가?
"어이, 그라함."
"쉿-빌리, 일단 여기서 빨리 빠져나가자."
몸에 걸친 유니온 군복의 힘을 믿고 기세좋게 허세를 부리긴 했지만, 지금 상황이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은 그라함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소년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자디스탄의 종교에서는 동성애는 매우 큰 죄라는 건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이 자리를 뜨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정말 온순하고 다정하게 애인에게 기대듯 그라함에게 바짝 붙어있던 세츠나는, 빌리가 운전석에 앉고 차에 시동이 걸리자 즉각 무서운 얼굴이 되어 품에서 떨어져 나갔다.
품 안의 온기가 휑 하고 사라져 약간 서운한 얼굴을 한 그라함에게 소년이 그 때처럼 다시 총구를 들이댔다. 백미러를 통해 이 쪽의 의사를 묻는 빌리에게 고개를 저어 '그대로 가라'고 신호하는 그라함을 보며, 세츠나는 그 때처럼 분명하고도 유창한 영어로 말한다.
"신세를 졌다고는 생각하지 않겠다. 넌 오늘 나에 대해 있을 수 없는 모욕을 했으니까."
"음? 그건 좀 너무한 비난이다, 소년. 바로 네 목숨을 구하기 위한 일이었잖은가."
"......"
"무엇보다도 이 쪽으로서도 나름 배려했는데, 키스가 맘에 안 들었다면 미안하지만."
빌리는 운전대에 머리를 박을 뻔했지만 그래도 애써 핸들을 잡고 흘끗 흘끗 뒤쪽을 바라보았다. 도저히 총구 앞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가볍게 항의하는 유들유들한 태도에 소년의 눈썹이 일그러진 것도 같았지만, 곧바로 평정을 찾고 차창 밖을 잠시 바라본 뒤 싸늘하고 무감정한 태도로 말을 이어간다.
"차를 멈춰."
빌리는 백미러를 통해 그라함을 다시 한 번쳐다보고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차를 세웠다. 아까의 거리와는 말 그대로 한참 떨어진, 어디로 숨어도 모를 골목 앞이었다.
"그만 갈 참인가? 굿바이 키스는 어떤가, 소년?"
"......사양이다."
싸늘하게 굳는 소년의 얼굴에는 말 그대로 살기가 어려 있어서, 빌리는 무심코 자신의 권총이 들어 있는 카 스탠드 근처를 흘끗 쳐다보았을 정도였다.
"예민한 나이라 그런가 매정하군. 실례는 이쪽이 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럼 잘 가게."
대체 간이 큰 건지 뻔뻔한 건지 모를 그라함의 말은 듣는 둥 마는둥. 소년은 재빠른 손놀림으로 차 문을 열고, 어딘가로 뻗어있을지 모를 골목 속으로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꼭 들고양이같은 몸놀림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쉰 빌리는 그라함 쪽을 바라보며 자신이 지금 이 남자에 대해 어이없어 하는 것인지 재미있어 하는 것인지 한동안 생각하다 후자로 결론짓고 입을 열었다.
"역시 그냥 보내주는 거야? 지난번에도 그렇고, 자네 저 녀석에게는 제법 관대한데?"
"응. 녀석도 고생했으니까. 그리고 난 그런 린치는 질색이다. 당분간 이상한 소문은 돌겠지만 그런 건 상관없어. 저 소년이 어디 소속이건 그런 식으로 희생당하면 곤란해."
군인에겐 찌질한 같은 편보다 훌륭한 적이 더 고픈 법이라지만 이건 좀 정도가 심한 것 아닐까? 빌리는 앞으로 한동안 친구에게 따라다닐 현지인 일부의 시선과 꼬리표를 생각하고 어깨를 움츠렸다. 아무리 본국도 아니고 아자디스탄이라지만 이건 좀 질이 고약한 루머라구, 그라함. 게다가 상대가 어떤 녀석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솔직히 처음 저 소년을 만났을 때가 만일 300년 전의 베트남이나 이라크였다면 넌 지금 죽어 있었을 거야.
"그나저나 충격이야 그라함. 네 녀석이 페도필리아였을 줄은."
"어째서 페도필리아라는 거야?"
"그럼 아냐? 보통 저런 어린애에게 진짜로 키스할까 싶어서."
"엥? 그런 건 전혀 아니다. 다만 곤경에 처한 녀석을 구해주고 싶었을 뿐이야. 아까 그 군중들은 진짜로 하지 않았으면 즉각 거짓말 하지 말라고 끌고갈 기세였으니까."
소년이 사라져간 어둠 속을 바라보며 그라함은 아쉬운 기색을 가득 담아 중얼거렸다.
"또 만나도 꽤 재미있을 것 같은데 말이지. 얘기를 좀 할 수 있는 데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무리야. 빌리 카타기리는 그렇게 확신했지만 별 말 없이 운전대를 돌렸다.
"우, 우와아아아아앗! 세츠..."
톨레미 함내에서 알렐루야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지려다 무언가에 꽉 막힌 것처럼 잦아들었다. 주황색 헬멧이 톨레미 벽에 부딪쳐 당구공처럼 튕겨갔고, 잠시 후 복도 벽에 기대어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초병에게 세츠나가 여전히 평소의 무심한 듯한 표정으로 건넨 말은 딱 한 두 마디였다.
"미안. 닦느라."
"...다, 닦아? 뭘?"
예상 외의 행동과 코멘트에 넋이 나간 알렐루야 앞에서, 세츠나는 가볍게 몸을 날려 이제는 복도 천장 부근에서 놀고 있는 주황색 헬멧을 집어들고 다시 날아왔다.
"이상한 녀석이었어."
통 자신이 뭘 느꼈는지 남과 뭘 겪었는지 털어놓지 않던 세츠나였던지라, 알렐루야는 방금 자신이 당했던 엉뜽한 일을 망각하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헬멧을 건네주고 이동 바를 잡고 가는 세츠나의 뒷모습을 보며, 알렐루야는 황당한 기분으로 뇌내대화를 시도했다.
- 하, 할렐루야. 세츠나가 이상해. 키스를 하는데 왜 닦는다는 말을 해?
- ......
- 할렐루야?
- 닥치고 하려던 거나 해 임마.
세츠나는 그 후로 그 일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당연히, 알렐루야도 절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