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ss..
"세츠나, 피아노 쳐?"
"치다니?"
소년이 지내는 안가 안에는 흰 피아노가 들어앉아 있었다. 일본 쪽으로 모일 일이 있어 잠시 왔던 록온의 눈에 띈 그것은, 분명 다른 곳에서 볼 수 있는 피아노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음에도 꼭 방 구석에 버려진 인형같은 데가 있었다. 주인이 단 한 번도 손대지 않고 구석에 처박아 버린 인형.
"피아노 칠 줄 몰라? 난 또 음악교습이라도 받고 있는 줄 알았네."
"...악기였나."
록온은 조금 기가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곧 세츠나 - 아랍계의, 아마도 아자디스탄 소년병 출신 - 라면 피아노에 대해 모를 수도 있다는 것을 추론해 낼 수 있었다. 소레스탈 빙에서는 전술과 전략은 가르쳐도 교양을 가르쳐주지는 않는다. 아마 이 소년은 이 악기를 연주하는 광경조차, 거의 본 적이 없을 터이다.
"어디 보자-"
의자를 빼내고 보니 피아노 뚜껑은 잠겨 있지 않았다. 열어젖힌 뒤 악보 따위 없는데도 악보대를 내린 것은 단순한 습관이다. 붉고 긴 커버를 들어내고, 좀 미안하지만 의자에 덮여있던 먼지를 가볍게 털어냈다.
"연주할 줄 아나?"
"어, 어렸을때 잠시 배웠으니까."
잠시 망설이다 장갑을 벗는다. 잠시 그만둘까 생각도 해봤지만, 이 소년에게 피아노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는 것에 흥미를 느껴버린 것이다. 거의 10여년만에 손대는 것이라 장갑을 끼고 다루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건반 왼쪽의 작은 공간에 장갑을 얹어 두고, 록온은 의자에 앉아 시험삼아 페달을 밟아 보았다. 왼쪽 페달이 좀 뻣뻣했지만 그런대로 무리는 없어 보였다.
건반을 만져보는 것이 이렇게나 오랜만이었음을, 직접 손을 대고서야 깨달았다. 서늘하고 매끄러운 흰 건반을 부드럽게 누르자, 기대한 것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소리가 머뭇거리듯 방에 울린다. 바라본 곳에서 붉은 갈색을 띤 눈동자가 조금 놀란듯한 표정으로 건반을 바라보고 있다. 아마도, 생전 처음 이 악기의 소리를 들어보는 것이겠지. 어쩐지 조금 뿌듯해져서, 록온은 기억하고 있는 가장 간단한 곡을 쳐 보기 위해 양손을 얹었다.
- 아, 이런.
"...무슨 일이지?"
남자의 얼굴이 아주 조금 일그러진 것을, 소년의 날카로운 눈은 놓치지 않았던가 보다. 순간 느낀 마음의 균열을 언제나 그래왔듯 별로 힘들이지 않고 갈무리하며, 록온은 서늘하게 웃어 보였다.
"아, 어쩌나. 잊어버렸어."
"무엇을?"
"역시, 너무 오래돼서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게 없네."
왼손으로 가볍게 3화음을 눌러 본다. 이건 기억하고 있다. 오른손으로 어울리는 멜로디를 눌러 본다. 역시, 음정을 제대로 잡을 수가 없다. 머리 속에서는 몇번이고 쳐서 완전히 외웠던 어린 시절의 곡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직접 손을 움직이려니 손가락이 긴 세월동안 굳어버리기라고 한 것처럼 비틀거린다.
"흠...들려줄 만한 소리는 못 내겠는데?"
몇몇 완전히 외우고 있던 곡들의 흔적을 찾아보려 하지만, 여전히 손은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 기억하고 있던 소리들, 일상이 평화로웠던, '평화'라는 말 외 생에서 별로 다른 것을 찾을 필요 없었던 시간의 소리들을 다시 불러올 수가 없다. 손에 와 닿는 감촉은 그대로인데, 없다. 그 때의 어떤 것도, 어떤 사람들도, 기억들만 남아서-
"미안, 세츠나. 뭐 대강 이런 거야. 이걸 제대로 활용하고 싶으면 교습 동영상이라도 찾아보면-"
어느 새 어깨에 손이 얹혀 있었다. 일어서 있는 소년의 눈은 의자에 앉아 있는 록온 자신의 눈보다 더 높은 곳에 있었고, 그래서 내리뜨고 있는 눈에 어떤 표정이 담겨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보려 해도 볼 수가 없었다.
선이 가늘지만 힘이 넘치는 소년의 팔이 청년의 어깨를 안았고, 이어진 키스는 격렬하고 뜨거웠다. 무방비로 열린 입술 사이로 마치 소년이 탑승하는 건담의 칼날처럼, 예리하고 사정 봐 주지 않는 혀가 들어와 머리 속을 휘저어 놓는다. 처음엔 놀랐고, 순간 밀어낼 뻔 했지만 곧 담담히 받아들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잠시 뒤 부드럽고 뜨거운 입술이 떨어져 나갔다. 뭔가 긴 말을 할까 했던 록온은 소년의 얼굴을 보고는 그저 웃으며 한 마디만 물었다.
"왜?"
"가르쳐 주지 않아도 돼."
"에?"
"가르쳐 줄 필요 없어."
소년으로서는 아마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싶었으리라. 아니, 이미 여러가지 의미를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말은 없는 주제에 어울리지 않게 과단성 넘치는 소년이 언제는 일일히 의도를 다 알려주며 행동했던가. 뭐 사실 굳이 더 묻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듯 싶어서, 록온은 다시 한번 웃으며 소년의 손이 인도하는대로 천천히 몸을 눕혔다.
"떨어지면, 화낼거다."
"떨어지지 마."
당할 수 없다. 한가지 의미인 자신의 말에 늘 여러가지 의미를 담아 곧게 답해 버리는 이 녀석은, 정말 당할 수 없어. 검은 머리를 안으며, 록온은 눈을 감았다.
"그래, 떨어지지 않을게."
-지키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