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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0년, 포르투갈의 왕가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국왕 알폰소 4세와 까스띠야의 베아트리체 사이에서 태어난 이 아이는 나중에 "정의왕(o Justiceiro = the Just)" 페드로 1세가 됩니다.
페드로 1세가 태어났을 당시 포르투갈은 각 주변국과 귀족세력들 사이에서 교묘하게 줄을 타듯 정치를 하고 있었습니다. 왕정 시대의 정치를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은 혼인. 페드로 1세의 혈통을 보면 아라곤, 까스띠야, 시칠리아, 헝가리 등등이 아주 고루고루고루 섞여 있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알 수 있듯, 당시 정세란 참 복잡한 것이었지요.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난 페드로는 당연히 정략 결혼을 하게 됩니다. 첫 혼약 상대는 다섯살 위인 까스띠야의 공주 블랑카였지만 페드로가 13살일때 취소되었고, 정식으로 결혼한 것은 1340년으로 상대는 역시 까스띠야의 공주인 콘스탄자였습니다. 당시로서는 흔치않게 신랑과 동갑으로 스무살이었던 신부, 아마 그 어린 왕자비의 불행이라면 자신이 데려온 시녀 중에 마찬가지로 20세의 젊음을 빛내고 있던 아름다운 금발의 이녜스 데 카스트로가 있었던 것, 혹은 그녀를 보자마자 암투가 난무하는 궁정에서 맘붙일 곳 없던 왕자가 곧장 사랑에 빠져버린 것이었을 겁니다.

이녜스 페레즈 데 카스트로
역사 속에서 초상화로 당당히 남는 것은 왕비나 혹은 왕의 인정받은 정부 뿐입니다. 당연히 고작 왕자비의 시녀일 뿐이었던 이녜스에 대해서는 많은 것이 남아있지는 않습니다. 공통되는 언급은 그녀의 금발이 매우 풍성하고 사랑스러웠다는 것, 발랄하고 선량한 성격이었다는 것, 그것조차도 사실은 구전일 뿐 거의 실체로 남아있지 않다고 해도 될만큼 희미합니다. 그녀의 존재를 입증해 주는 것은 그녀의 묘 뿐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요.
어쨌건 페드로는 부인의 시녀인 이녜스를 깊이 사랑했고, 후계자로서의 의무에는 충실하여 콘스탄자에게서 곧 죽어버린 첫 아이를 비롯하여 세 명의 아이를 보았지만 그 뿐. 콘스탄자가 살아있을 때부터 이녜스를 가까이 하여 결국 태어나자마자 죽긴 했지만 첫 아들 알폰소까지 보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1349년 9년간의 쓸쓸한 결혼생활을 뒤로 하고 콘스탄자가 죽자 이녜스를 왕자비로 맞아들일 생각까지 하게 되지요.
그러나 당연히, 사정은 그렇게 넉넉하게 돌아가 주질 않았습니다. 당연히 아들의 외도를 몰랐을리 없었던 알폰소 국왕은 전혀 이녜스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꽤 주말드라마의 "그런 신분의 여자는..."운운 같지만, 사실은 좀더 복잡한 이유도 있었지요.
아까 열거한 혈통과 혼처에서 보아도 알 수 있듯, 당시 포르투갈은 까스띠야와 주로 혼사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혼사의 미묘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정략결혼의 대상자라고 해서 반드시 그 나라의 힘이 궁정 내에서 강해지는 것이 좋지는 않다"는 것이지요. 무슨 얘기인고 하니, 대대로 합스부르크가의 공주들이 프랑스에 시집왔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결코 "프랑스 인들이 오스트리아 권력가들을 매우 환영했다"는 의미가 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정략결혼의 양면적인 면이랄까요. 나라간의 교류가 확대되는 결과도 가져오기도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인질"의 역할을 하는 것이 또 정략결혼이기도 합니다. 가뜩이나 부담스러운 대상인 까스띠야인데, 하필이면 그 까스띠야인 시녀와 왕자가 진심으로 사랑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늘 그렇듯 이녜스에게는 오라버니들과 아버지까지 있었고, 사랑에 눈먼 페드로는 이녜스의 친척들에게도 궁정 출입을 허락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가뜩이나 까스띠야 세력이 강해질까 싶어 신경을 곤두세우고있던 알폰소 국왕과 포르투갈 귀족들의 신경질을 돋운 것이지요. 게다가 죽은 콘스탄자가 낳은 아들인 페르디난도는 너무 어렸고, 왕자비, 이어 왕비가 될 이녜스가 페르디난도를 몰아내게 된다면? 귀족들로서는 자신들이 정립해 놓은 세력 판도가 흔들리는 것은 조금도 반가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돌아가서 1349년, 29살의 나이로 콘스탄자가 죽자 알폰소 국왕은 다 알면서도(......) 다른 혼담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페드로는 결혼은 왕비랑 하고 사랑은 애첩과 한다는 당시로서는 매우 일반적인(...) 윤리관을 전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녜스는 이미 페드로의 아이까지 낳았던 몸. 페드로는 그녀 외의 사람과는 결혼할 수 없다고 버티기 시작하고, 아마 못지않게 외곩수 성격이었던 것 같은 알폰소 국왕은 그 대가로 이녜스를 궁정 밖으로 추방해 버립니다.
아마도 국왕은 못 보게 되면 사랑이 식을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시녀 한둘 건드리는 거야 누구나 하는 일이고, 서자 한둘쯤 낳는 거야 당연한 일이니까요. 천한 계집 따위 빨리 내쫓아 버리면 왕자가 정신 좀 차리고 새로운 왕자비에게 관심을 둘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참 신기하지요? "세상을 오래 살아 알만큼 안다"는 어른들이 흔히 하는 실수 중 하나는, 재미있게도 마키아밸리가 지적했던 "지나치게 논리적인 자들의 실수"와 동일합니다. 상대가 얼마나 비논리적인가를 깨닫지 못하고, 논리적으로, 합리적으로 행동하리라 믿다가 무섭게 뒤통수를 맞는 것이죠.
무슨 말인고 하니, 넵! 여러분이 예상하신 그대로 페드로의 사랑은 전혀 식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역경을 만나는 바람에 더더욱 기름을 끼얹은 듯 불타올라 버렸습니다. 왕자는 무려 이녜스를 별궁 근처의 작은 집에 머물게 하며 계속 그 곳을 들락거렸습니다. 아니, 들락거린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35세의 나이가 될때까지 페드로는 기회가 될 때마다 이녜스가 머무르는 작은 집을 찾아갔고, 그 집에서 엄마와 함께 살게 된 아이의 수는 무려 셋이 되었습니다! 사냥 등등을 핑계로 페드로는 늘 밖으로 나돌았고, 이녜스와 아이들이 기다리는 자신의 "진짜 집"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이것은 외도도, 첩질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콘스탄자가 살아있을 때부터, 페드로에게 자신의 부인은 이녜스 단 한명이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영원히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것이었지요. 곧 밀려드는 혼약을 계속 거부하는 35세의 왕자가 대체 누구의 집에 찾아가 머무는 것인지가 귀족들의 입을 통해 알폰소 국왕에게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마 이쯤 되었을 때 알폰소 국왕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들의 이녜스에 대한 애정이 결코 한때의 열정이나 어리석은 연애놀음이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왕은 결정을 내립니다.
좀더 극적인 이야기꾼은 얘기합니다. 왕이 직접 이녜스를 만나러 갔노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던 이녜스는 임금님이 자신을 보러 왔다는 이야기에 드디어 자신이 인정받을 날이 온 것이라고 믿고 손주들을 보여드리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다가가 무릎을 꿇고 왕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고도 합니다.

물론 훨씬 후대에 그려진 그림입니다.
그러나 실상, 왕은 세 명의 귀족을 보냈을 뿐입니다. 그들은 페드로가 없는 틈을 타 이녜스에게 가서 그녀를 죽여버렸습니다. 그 뿐입니다. 서른 다섯의 어머니가 되어있던 그녀가 칼에 찔려 죽었는지 목이 졸려 죽었는지, 어째서 그녀는 죽었는데 아이들은 살았는지도, 그 아이들을 누가 보살펴 주었는지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1320년 태어났던 이녜스 데 카스트로가 1355년 살해당했다는 것 뿐이고,
곧이어 서른 다섯살의 황태자가 예순 넷의 아버지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 뿐입니다.
1355년부터 1356년에 걸친 전쟁에서 페드로는 사실 별로 좋은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솔직히 말한다면 사실상 졌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인 1357년 아버지가 서거하게 되는 바람에 그는 왕이 되었습니다.
왕비 외의 여성과 바람을 피운 왕과 왕자들은 많습니다. 아니, 정실 외의 여성과 바람을 피우지 않은 왕은 쑥맥으로 유명했던 성왕 루이 9세를 제외한다면 없다고 봐야 합니다. 애첩을 두고 애첩의 자식들을 돌봐준 왕도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한 여성 때문에 정략결혼을 거부하고, 그녀의 죽음을 이유로 내란을 일으키고, 자신의 친아버지에게 반역하여 왕이 된 것은 페드로 뿐일 것입니다. 적어도 제가 아는 케이스는 페드로 하나 뿐입니다.
왕이 된 그는 너무나 당연히도 죽은 이녜스를 위해, 혹은 살아남아 버린 자신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처를 강구합니다. 즉각 그는 이녜스를 죽인 세 명의 귀족을 수배합니다. 그 중 한 명은 낌새를 채고 재빨리 도망쳐 끝내 잡을 수 없었지만, 두 명은 수배 후 결국 끌려오게 됩니다. 페드로는 자신의 '왕비'를 죽였던 그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고, 전해지는 말로는 산채로 그들의 심장을 도려냈다고도 하고, 손으로 뜯어냈다고도 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 심장을 씹었다는 건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강조된 후대의 윤색 냄새가 나지만, 어쨌건 그들이 결코 용서받지 못했다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피의 복수를 한 후, 페드로는 곧 그녀에게 주었어야 할 것을 주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습니다. 그는 자신과 이녜스가 이녜스가 죽기 전 해인 1354년 사제 앞에서 비밀 결혼을 했다고 주장하기에 이릅니다. 가톨릭에서는 왕과 왕비의 결혼이건 필부들의 결혼이건 "사제 앞에서"이루어지면 정식 결혼으로서 동등한 효력을 지닙니다. 즉, 페드로는 어떻게든 이녜스를 "정실 왕비'로 만들어주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이 혼인에 대한 증거는 국왕의 주장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래서 지속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페드로는 끝내 이녜스를 교황청에서 인정한 정식 왕비로 만들어주진 못했습니다. 이녜스의 아이들 또한 원래 후계자였던 페르디난드의 후계자 자리를 갖지 못했지만, 적어도 왕자 공주로서 아버지의 인정을 받으며 지체높은 귀족들과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페드로는 교황청의 인정과 관계없이, 이녜스를 왕비로 선포하고 "즉위식"을 거행합니다. 죽은 왕비의 즉위식에 참석한 것은 바로 왕비의 관 속에 들어있던 시신이었다고 합니다. 왕비의 예복을 입은 시신이 옥좌에 안치되었고, 생전에 그녀를 인정하지 않던 귀족들은 모두 그녀의 부패한 손에 입을 맞추어야 했다고 하지요. 이것은 그야말로 '전설'. 이 죽은 왕비의 즉위식에 대해서는 상상력이 넘치는 그림들과 이야기들이 존재할 뿐 아무것도 입증된 바 없지만, 한가지만은 확실합니다. 페드로는 코임브라에 묻혀 있던 이녜스의 시신을 이장하여 자신의 관이 놓일 곳 맞은편에 안치합니다.

왕비로서 묻힌 이녜스
그렇습니다. '맞은편'입니다. 부부의 관을 나란히 안치하는 일반적인 방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페드로의 관은 저 이녜스의 관 맞은편에, 서로 발을 맞댄 형태로 안치되어 있습니다. 이 이색적인 안치 형태에는 매우 기독교인다운 이유가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날, 부활하자마자 서로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과연, 아가사 크리스티의 말 그대로입니다.

"사랑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요.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